[4.3 65주년] 12회 증언 본풀이 마당

“80이 넘어도 분통이 서리다. 밤새 잠을 못자 옥상에 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한다. 아버지 어머니 시신 수습하던 장면은 100살이 넘어도 잊을 수가 없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출신인 김이선 (82)씨는 17살에 4.3을 겪었다. 4.3사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예비검속으로 큰 오빠를 잃었다.

28일 오후2시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열린 4.3증언 본풀이마당에 증언자로 선 김 씨는 “4.3 때 겪은 일 말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고 열흘 스무날 말해도 모자라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씨의 아버지는 해방 전 일본에서 회사를 다닌 덕에 제법 부유하게 지냈다. 1947년 3월 1일 조천만세운동에 이름이 올라갔던 이유로 두 오빠 이름이 올라가 도피자 신분이 됐다. 성품이 올곧았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자진해서 수용소에 들어갔다.

김 씨는 “수용소에 들어간 아버지가 죽고나서 일주일 후에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헌 옷 입지 말고 고운 옷 입고 다녀라 죽으면 죽는 대로 받아들여라'라고 당부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민보단 할아버지들이 우리집에 와서 가메기 뜯은 거 덮어 있으니 확인하라고 하셨다. 언니는 시집갔고, 동생은 아홉 살이었다. 시신을 수습하고 관 대신 문을 떼다가 아버지 어머니를 묻었다. 그 생각을 하면 100살을 살아도 잊을 수가 없다”며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 열두 번째 4.3 증언 본풀이 마당에 증언자로 나선 김이선(82) 씨.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둘째 오빠는 인천으로 도피하고 사태가 완화되고 나니 큰오빠가 집에 돌아왔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예비검속에 끝내 죽음을 당했다.

김 씨가 회상을 이어갔다. “신안동이 불타기 전 함덕 군부대에 잡혀갔다. 군인들이 동네 청년들 어디 숨었는지 말하라고 우리를 다 잡아갔다. 우리 마을 청년들이 아닌 남자애들 6명을 데리고 왔다. 마을 원로가 나서서 자기네 믿고 살려주면 청년들을 바로 인도해준다고 했는데 그 어르신을 군홧발로 막 차서 죽였다. 청년 여섯 명을 두고 총질하는 건 열두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녀 나이 80세가 넘도록 어버이날에 꽃 한 번 못 달아봤다. 자식들이 사다줘도 그냥 둘 뿐 가슴에 한 번 달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꽃 한 번 못 달아드렸는데 내가 어떻게 꽃을 다느냐는 이유에서다.

김 씨는 “지금도 어머니 아버지 산소에 열흘에 한 번씩 간다. ‘제가 왔습니다 둘째가 왔습니다 걸어질 때까지는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고 탄식했다. 

   
▲ 4.3 증언 본풀이 마당에서 고신종 씨가 4.3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고신종(76세.제주시 용강 출신) 씨는 열세 살 나이에 4.3을 겪었다. 눈앞에서 어머니, 가족, 친지를 잃었다. 그가 나고 자란 용강리는 1948년 2월 4일 동부 대토벌 작전으로 8개 마을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곳이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보며 뛰라는 어머니 말만 듣고 뛰었다. 놓쳐버린 어머니는 그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셋아버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가족들을 거의 잃다시피 했다.

고 씨는 “아버지만 살아남아 그와 함께 산으로 도망쳐 올라갔다.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동네사람 안 죽은 밭이 없었다. 가둬놓고 총을 막 쏴버렸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는 아버지와 산으로 몸을 피했다. 그는 “교래 위에 샛머흘에서 지냈다. 청년들이 배고픈 걸 못 참고 동네에서 소나 말 한 마리씩 잡아먹었다.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소식에 산을 내려왔다. 산지 주정공장에 갇혔는데 우연히 할머니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와 지냈다. 아버지는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 지냈다”고 말했다.

이날 본풀이 마당에는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출신 변태민(74)씨도 증언자로 나섰다.

4.3증언 본풀이 마당은 2002년 제주민예총이 주최한 이후 2004년부턴 (사)제주4.3연구소가 맡아서 올해로 열두 번째 진행해 오고 있다. 4.3 당시의 기억들을 공유하고 잊지 말자는 취지로 열려왔다.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