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良識)을 버린
 
노(老) 작가의 추락은

4·3의 아픈 역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제주도가 낳은 대표적인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온 현길언 씨가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필진으로도 참여하는 학술교양지 《본질과 현상》 2013 여름호에 <과거사 청산과 역사 만들기-4·3진상보고서를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 제주4·3을 ‘남로당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나서면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길언 씨는 제주가 낳은 대표적인 인문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녹원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때 4·3작품을 쓰기도 했던 그는 제주도 태생으로 다년간 제주대학교 강단에 서다 서울의 한양대로 자리를 옮겨 퇴임 시까지 교수로 재직하였고, 퇴임 후에도 중앙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원로문학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슬픈 지식인의 말로를 본다. 이번 《본질과 현상》 2013 여름호에 실린 그의 글은 인문학자이면서 양식 있는 교수출신 소설가의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왜곡과 편파적이고 악의적인 의도에서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경악을 금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글의 논조가 그동안 군경 측과 수구세력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바를 재탕 삼탕하고 있는 데서 그의 오랜 인생의 경륜과 식견을 재고하게 하는 바 있으며, 또한 이 글에서는 도저히 그동안의 중도보수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조차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양식 있는 작가로서 극우파의 정치적 공세에 가까운 표현들을 구사하면서 4·3진상보고서와 4·3운동의 역사를 뒤흔드는 모습은 지난 대선 시기, 양심적 지식인이면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인정받던 시인 김지하의 자기배반에 이은 또 다른 지식인의 추락이기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현길언(이하 현 씨)의 글은 시종일관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사업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의 한 사업으로 몰아세우면서, 모든 것을 노무현 지우기와 연결시켜 논지를 전개함으로써 객관성과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 억지 꿰어 맞추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동안 군경 측과 수구세력이 줄기차게 제기해 온 내용들을 마치 의도적으로 배제된 새로운 자료인 양 글 속에서 제출, 서술하면서 4·3진상보고서를 편파적인 보고서로 폄훼하고,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으로 활동하거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참여한 학자들을 ‘악령’으로 몰아세우는 등 비이성적이고 비학술적인 태도로 흠집 내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러한 현 씨의 태도는 지난 반세기 동안 삭제당한 역사, 금단의 영역인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벌여 온 지난한 4·3운동의 역사 자체를 오도하고, 특히 4·3희생자들을 마치 남로당의 반란에 가담하거나 추종했던 자들로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히, 그의 글들은 우선 그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팩트(팩트라고 주장)’를 설정해놓고, 이를 비판하면서 수구세력이 주장해 온 논지를 전개해 나가는 데서 가장 큰 오류가 있다. 이는 그의 글 전반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 글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우선 현 씨는 4·3진상보고서 작성사업이 “노무현 정부 들어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팩트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4·3위원회의 구성과 보고서 작성은 4·3특별법에 따른 것으로, 이는 이미 김대중 대통령 때 제정된 법률이다. 따라서 위원회의 구성 문제나 진상보고서 작성계획도 이미 그때에 결정된 것이므로 이를 참여정부의 일로 연계시켜 과거사를 청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라는 표현은 말이 안 되는 대목이다.

또한 현 씨는 그의 글에서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4·3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정부에 대해서 저항하여 일어난 제주4·3사태’라는 표현을 썼으며, 뒤이어 ‘남로당 무장대의 반란의 정당성’을 말했고”라고 했는데(현 씨의 글에서는 사건이라는 공식용어도 헷갈린 채 ‘제주4·3사태’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내용이다. 또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탄생을 저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사건으로 미화함으로써”라며,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마치 있었던 근거인 양 내세우고 있다.

현 씨는 이와 관련해 “이 사실에 대해 양조훈 씨에게 그 사유를 물었더니 공식 담화문에 없는 내용을 대통령이 자의로 즉석에서 발표했다고 말했다.”라고 각주를 달았으나, 확인 결과, 정작 당사자인 양조훈 씨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펄쩍 뛰고 있다. 또한 4·3기념관의 노 대통령 육성파일에도 이 같은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대통령 본인이 전혀 하지 않은 말을 본인이 들었다고 강변하며, 이를 근거로 그를 공격하는 것은, 현 씨 자신의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이념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의 일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그는 처음부터 중립적이지도 않으며, 팩트에 근거해 논리를 펴는 것도 아닌 셈이다. 결국 이 대목은 현 씨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스스로 곡해하여 청취한 자가당착적 ‘기억의 조작’일 수 있다.

또한 현 씨는 그의 글 중에서 “위원회 주도 세력들이 의도한 보고서의 중심 논점은 다음과 같다. (1)4·3사건은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5·10선거를 반대하고 외세인 미군정의 세력과 부정부패 세력에 저항한 정당한 민중저항운동이다. (2)이를 무력으로 탄압한 이승만 정권은 불법을 자행하여 무고한 민중을 살해하였다. (3)미군정하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처음부터 미군정이 개입하였고, 그 진압과정에서 미국이 음험하게 작용하였으므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의도는 결국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주적 결정권을 억압하는 외세를 배격하여 반미사상을 강조하는 데 있다. 희생당한 주민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애초의 주요 목적까지도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4·3보고서의 결론이라고 했는데, 보고서 전체에서 그 어디에도 이러한 글은 실려 있지 않다. 어쩌면 이 부분은 그가 바라보는 4·3운동진영과 4·3유족들에 대한 자기 입장의 단면일 수 있다.

4·3진상보고서는 오히려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 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 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서술, 4·3발발의 복합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라고 하여, 무장대의 봉기 당일,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김달삼의 해주대회 참석 등도 유혈사태를 가속화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의 글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또한 “그래도 사실(史實)은 역사적 평가가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걸러지고 다듬어져 진실에 다(가)간다고 믿는다.”라며, 무엇보다 팩트에 입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사실(史實) 이전에, 사실(事實) 자체의 확보에도 실패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가 날조해낸 것이기에 더욱 큰 문제이다. 아무리 직업이 소설가라 할지라도 이는 엄연히 수만의 억울한 죽음을 동반한 비극적 역사를 다루는 엄정한 글이다. 그럼에도 사실관계도 확인되지 않은, 더 나아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창작해내어, 그것을 근거로 노 대통령과 학자들, 유족과 도민들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학자이면서 소설가인 양식 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아 온 그동안의 자기 역사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악의에 찬 책동일 뿐이다.

현 씨는 또한 “4·3사건을 의로운 저항이 아니고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다.”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가 증거라고 내세운 문건들 역시 4·3무장봉기 이후에 이를 추인하는 정치적 문건들에 불과하며, 이로써 남로당 중앙당의 조직적 계획에 의해 4·3이 발발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4·3진상보고서의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는 결론은 틀리지 않은 셈이다. 오히려 이 대목은 그동안 군경 측과 수구세력들이 북한과의 연계설을 끌어내기 위해 주장해온 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현 씨는 그러면서 존 메릴의 ‘제주 반란’ 용어 사용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객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존 메릴은 오히려 1988년 11월 17일자 한겨레신문에 자신이 내한하여 벌인 강연에 대한 ‘반론에 대한 답변’에서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반란’으로 쓰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잘못 이해해 다른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이 용어의 편의적 사용을 경계한 바 있다. (어쩌면 현 씨는 정확히 이 존 메릴이 가장 경계했던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한 경우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의 연구 결론은 “제주도 반란의 발발이야말로 한국에서 적합한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미군정이 실패한 증거로서 입증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우익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묵인하였으며,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돌림으로써 우익 쪽의 강화를 자극하였고, 그것이 제주도 4·3항쟁으로 이어지는 여러 사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존 메릴의 ‘반란’은 현 씨가 강조하는 ‘남로당의 반란’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미 ‘관례상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 또한 그러한 반란조차 당시 “미군정의 제주도에서의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실패한 데서 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4·3발발의 기원은 이러한 미군정의 실패에 따른 항쟁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주민 희생의 문제를 트집 잡는 것, 미리 결론을 정해 놓았다는 점, 사학전공자들이 없는 것처럼 호도하는 문제 등 지적할 대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나, 이 글의 목적이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의 글에 대한 비판은 이 정도로 줄이고자 한다.

이상 짚어 본 몇 가지 중대한 그의 주장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그의 가족사와 4·3 당시 9세였던 그가 겪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볼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는 지식인이다. 그러므로 그런 개인적인 면모들을 뛰어넘어 장기지속의 역사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하며, 좀 더 엄중하고 세심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었으나, 사려 깊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이번 《본질과 현상》에 실린 그의 글은 그야말로 4·3의 운동가도 전문가도 아닌 상황에서, 중도적이지도 않은, 4·3의 역사적 사실이나 과정의 팩트에 근거하지도 않은 졸문이며, 의도적 곡필이자 악필이다. 또한 군경 측과 수구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문으로 읽힐 뿐이다. 그의 글들은 얼핏 보면 중립적 지식인이 대단히 정교하게 쓴 글들처럼 체제를 갖추고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결론을 전제하고 무리하게 여러 자료들을 한 가지 논지-오직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연관성-에 짜 맞추느라 그야말로 엉성한 글이 되고 말았으며 해괴하고 무리한 주장만 잔뜩 늘여놓은 셈이다.

우리는 그가 온전히 제주가 낳은 양식 있는 원로문학인으로 남길 바랐다. 최근 몇 년간 그가 보여 온 각종 강연회에서의 행보나 《본질과 현상》 2013 봄호에 ‘대한민국 재향경우회 제주도 지부 등 12개 단체가 쓴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한 반론>’을 실은 것이나, 최근 세계적인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영화 ‘지슬’에 대한 강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어른으로서, 원로문학인으로서의 입지를 고려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려 애써 노력해왔으나, 이번 《본질과 현상》에서 보여준 그의 글들은 더 이상 그를 위한 이러한 배려들이 무용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오늘 이런 우리의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다.

현 씨는 이제 양식 있는 중립적인 학자, 소설가연하는 순한 양의 탈을 벗어버린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도민사회에서 제주의 자랑으로 인정해 온 보람도 없이 이렇게 인생의 말년에 자신이 쌓은 모든 업적을, 이 불충분하고 악의적인 글로써 그 뿌리부터 무너져 내리게 하는 것을 보면서, 힘든 시대 속 부실한 지식인의 면모에 한 줌 서글픔을 느낄 뿐이다.

2013년 6월 28일

(사)제주4․3연구소

(사)제주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4·3도민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