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에 돌아오는 靑馬의 해 甲午年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쌓여온 恨서린 아픔과 갈등을 씻어내고 마음 편한 한해, 희망을 말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저를 믿고 이 엄숙한 단상에 불러 주신 제주4.3평화재단 이사님 여러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또한 저의 4.3평화재단 이사장 취임을 격려해 주시려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4.3유족회 가족 여러분 감사합니다.
앞서 우리 재단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주신 전임 이상복 이사장님, 장정언 이사장님, 김영훈 이사장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사님들로부터 이사장직 승낙을 요청 받으면서 줄곧 고민해왔습니다.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내가 <4.3의 바른역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회의하고 스스로 달래어 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단상을 외면하지 못하게 내 스스로를 옥죈 것은 4.3의 참혹한 비극을 통해 도민들이 이뤄내고 있는 <평화정신>을 세기의 기록으로, 새로운 역사로 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4.3사건이 일어난지 벌써 66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주도민들은 4.3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힘을 쏟아왔습니다. 1960년 제주대 학생 몇 명이 처음으로 4.3사건 진상규명의 횃불을 든 이후 이를 반대하는 온갖 탄압과 제지와 회유가 있었지만 제주도민들이 바른역사를 위한 한결같은 투쟁과 노력은 어둠에 묻혀있던 4.3의 진실을 양지의 공론장으로 끌어냈습니다.
정부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4.3특별법>을 제정하고, 참여정부는 노무현대통령이 직접 국가권력에 의해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이명박정부는 ‘제주4.3평화공원조성 3단계 사업계획’을 확정지어 위령사업과 4.3교육사업 등에 정부예산 120억원을 투여할 수 있도록 결정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제주도민의 숙원인 4.3추념일 지정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4.3 66주년이 되는 올해는 국가 추념일로 4.3위령행사가 거행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는 숱한 아픔과 갈등과 원망들이 쌓여 왔습니다.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논쟁들이 오히려 진실을 호도하거나 아름다운 제주 사회를 분란의 마당으로 만드는 일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제주의 평화정신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4.3가족들의 화해와 상생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평화정신을 길이 선양하고 싶습니다. 형제끼리도 등을 돌릴 정도로 심각한 갈등과 반목을 슬기롭게 풀어내고 밝은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제주민들의 평화정신과 슬기를 훌륭한 유산으로 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남겨진 것은 평화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과학과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인간이 만든 모든 조형, 모든 시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4.3을 진상규명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네 탓, 내 탓만을 논하는 현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들이 화해정신으로 슬기롭게 해결한 평화의 정신을 길이 선양하고 세계인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광보(廣報)하고자 합니다.
아무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4.3평화재단 이사님! 4.3가족 여러분! 우리가 반세기 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이룩하고 있는 평화정신을 더욱 키워내기 위해 저를 도와주십시오.
세계인이 바티칸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기원하고 주목하는 것은 신앙을 넘어 인류 평화와 사랑을 위한 상징이고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평화정신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는 4.3에 관한 한 작은 일을 크게 확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큰일을 작게 감추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4.3위령제단은 진실만을 말하는 고해성사의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정신이 거기에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를 위해 제주4.3의 평화정신 선양사업을 펼쳐나갔으면 합니다. 어둠의 역사에서 빛의 역사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부적인 환경 조성과 동의를 얻는데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4.3평화재단은 법적으로 사업 범위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4.3의 추가 진상조사 △희생자 추모사업 △4.3유족 복지사업 △문화 학술사업 △평화교류사업이 그 큰 틀입니다. 이 기본적인 사업에도 충실하겠습니다. 성문 조항에 집착한 경직된 시각에서 사업을 추진하는게 아니라 유연한 시각으로 접근하겠습니다.
온 국민들께 말하고자 하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경건한 4.3제단 앞에서는 모든 지도자들이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고 믿음을 주었으면 합니다. 정치적인 수사(修辭)가 난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난 세모에는 4.3의 평화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의례가 있었습니다. 저는 감탄했습니다. 제주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함께 손잡고 충혼묘지와 4.3제단을 참배해주신 것입니다. 그 지도자님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두 단체 지도자들의 화해의 행보는 제주4.3의 역사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사심없이 일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주도민과 4.3가족 여러분에게 행운이 함께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