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그렇게 간다. 누가 어떻게 흘려보내는지 알 수 없이 그러나 분명히. 분명히 흘러가는 시간은, 살면 살수록 사는 게 어렵다는 말을 (굳이) 증명해 주는 증인과도 같다. 희한한 것은, 앞으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이건만 나는 점점 시간의 뒤안길로 돌아가 인간으로서 확인해야 하는 역사를 마주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 하나로 버거운 인생인데, 그 속으로 꾸역꾸역 역사의 메아리는 밀려오고, 나는 그 메아리를 회피할 권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다. 내가 안, 내가 본, 내가 들은 그것을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4·3
마주하지 않을 권리가 없어 나의 제주4·3평화기행은 시작되었다. (후배 기자가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서 제안한 취재가 내 몫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 소속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송영섭)가 주관한 이번 기행은 4월 1일부터 3일간 제주 4·3평화공원 방문을 시작으로 북촌마을·곤을마을·무명천 할머니 생가·섯알오름 학살터·동광 큰 넓궤·무등이왓마을 방문, 영화 “지슬”과 4·3문화예술축전 관람, 4·3위령제 참석으로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듣고 보고 적고 녹음하고 사진 찍는 반복의 행위가 힘겹기도 했지만, 기행에 참가한 20여 명도 4·3의 서늘한 신음을 느끼고서는 다른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기행을 시작하며 부른 다음 노래(기도)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내가 눈을 뜨게 하소서
내가 눈을 뜨게 하소서
저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내가 눈을 뜨게 하소서
내가 길을 열게 하소서
내가 길을 열게 하소서
저 아득한 침묵 속에서
내가 귀를 열게 하소서
내가 일어서게 하소서
내가 일어서게 하소서
저 길고 긴 추위 속에서
내가 일어서게 하소서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4·3인데, 나는 학교에서 4·3을 배운 기억이 없다.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2003년에나 있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4·3은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역사가 아니다.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비극적인 역사로서,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 27만 인구 중 약 3만 명이 무고하게 죽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안내를 맡은 4·3연구소 김창후 소장은 4·3을 “누구나 아는 4·3, 아무도 모르는 4·3”이라고 정의했다. 눈앞에서 총살당한 부모와 형제를 기억하며 사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옷가지 등으로 겨우 헛묘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아직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 밖에 꺼내기 두려워하는 그들의 역사를 직접 찾아나서야 하는 2013년이기에 그 말은 슬피 옳다.
순덕이와 무명천 할머니는 죽는 게 나았을까
“아까 그 여자 그냥 쏴버리지 그랬냐?”
“그러게, 그냥 쏴버릴 걸. 아니야,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아.”
“저게 사는 거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
“네가 죽어 봤어?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폭도는 무슨….”
“폭도가 있긴 있는 거냐?”
“폭도가 있든 없든 우리가 지금 폭도 때문에 이러냐? 좆같은 명령 때문에 이러고 있지.”
4․3을 소재로 만든 영화 “지슬”에 나오는 박 일병과 김 이병의 대화다. 그토록 잔인했던 토벌대에도, 붙잡혀 온 순덕이를 두고 “저 여자도 폭도입니까?”라고 울부짖는 박 일병과 같은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다만,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을 뿐이리라.
해안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중산간마을은 4·3의 최대 희생처였다. 그 지역을 통행만 해도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초토화 작전’이 토벌대(정부)의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광리도 그 중 하나다. 무등이왓마을 사람들과 함께 ‘큰 넓궤’라 부르는 동굴에 숨어 있다가 학교에 책을 가지러 간 순덕이를 강간․총살하는 토벌대. 그 잔인함에 몸이 떨려 나는 화면조차 제대로 못 봤지만, 피맺힌 한을 품고 살아가는 4·3 유족들은 영화가 당시의 아픔을 너무 덤덤하게 표현했다고 아쉬워했다.
실제로 무명천 할머니 생가를 방문해서 본, 할머니 이야기가 담긴 영상에서도 그와 꼭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1949년 1월, 경찰의 총격에 아래턱을 잃어버린 진아영 할머니는 2004년 돌아가실 때까지 소화 불량, 영양실조, 위장병을 앓아야 했고, 실어증에 걸린 듯 굳게 입을 닫아야 했으며, 집 앞 길가에 나갈 때조차 문을 꽁꽁 잠그고 다니셨다. 턱을 감싼 무명천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풀어 보일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할머니를 ‘무명천 할머니’라 불렀다. 사람들과 식사 한번 같이 한 적 없었던 할머니의 영상을 볼 때, 그 영상을 수십 번 보셨다는 김창후 소장님은 수십 번째의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움푹 팬 상처의 웅덩이에 고이는 고름 같은 분노와 설움은 누구의 몫일까. 그래서 영화에서도, 무명천 할머니를 본 사람들도 ‘죽는 게 나을 뻔했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순이삼촌’(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주인공)들을 비난할 권리도 없다.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
기행 중 몹시 아름답고도, 그 아름다움이 상처가 되었던 곳이 두 군데 있다. 곤을마을과 무등이왓마을. 제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 곤을마을은 4·3으로 없어진 160여 마을 중 한 곳이다. 한라산 금족령(통행금지령)이 해제되고도 60여 작은 마을을 포함해 130여 마을은, 곤을마을처럼 재건되지 못했다. 집터와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 주는 작은 길)가 옛 흔적을 안고 남아 있어 곤을마을은 가장 먼저 복원되어야 할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일행을 반긴 것은 만발한 유채꽃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유채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송영섭 목사는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불렀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 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안치환, “잠들지 않는 남도”
간 데 없이 불 타 없어진 안채와 바깥채 자리에 주인을 기다리듯 목을 빼고 자라난 노란 유채꽃, 그 ‘피에 젖은 유채꽃’은 형상화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노란 유채가 붉게 물들기까지, 죽고 또 죽어야 했으니까.
올레 18코스에 속하기도 하는 이곳을 이제 ‘예쁘다’라고만 말할 수 없게 되어 괴롭다. 여기 이 마을은 왜 집터만 남게 되었는지, 손재주 참 좋았다던 동네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는지, 방터(말방아터)에서 곡식을 찧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묻는 것이 산 자의 도리일 테니 말이다. 그것은 목숨만은 건졌어도, 아버지가 총에 맞고 어머니가 불에 타 돌아가셨기에 이 마을로 돌아올 생각조차 못한 자식들 아닌 바로 우리의 도리다.
툭 스러지고 툭 스러져 간 동백꽃들
아름다워 더 슬픈 두 번째 마을은 동광 큰 넓궤로 피신했던 이들의 터전, 무등이왓마을이다. 이유 없는 학살의 다른 이름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1948년 11월, 주민 120여 명이 두 달간 야산으로, 동굴로 피신을 갔을 때도, 무등이왓마을의 동백나무는 지금처럼 길가에 줄 지어 서서 꽃을 피웠을 것이다. 동백꽃은 4·3을 상징하는 꽃이다. 시들지 않은 빨간 동백꽃이 질 때 툭, 툭, 하고 떨어지는 모습이, 이유도 알지 못하고 단번에 목숨을 잃은 4·3의 희생자들과 닮았기 때문이란다.
“난 돼지 집에 숨언 살았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아나수다.”
- 무등이왓마을 터 입구에 세워진 표석의 글귀 중
살아남아 할머니가 된 이는 구하지 못한 아기 생각에, 맷돌을 갈 때 마다 울며 저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툭 스러지고 툭 스러져 간 10세 이하의 (신고된) 어린 아이만 814명이니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살아서 또 죽어서 구하지 못한 아기 생각에 눈물 흘렸을까. 4·3위령제에 참석한 백유일 씨의 회상 또한 제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집단적 슬픔과 실존적 아픔을 느끼게 했다.
“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부가 4·3 때 돌아가셨어요. 저뿐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면, 친구들이 한날 모두 도시락을 제삿밥으로 싸 오곤 했었죠.”
그의 학창시절 친구이기도 하다는 오멸 감독이 “지슬”을 제사 형식으로 만든 것과도 묘하게 겹쳤다. 명절 음식 싸 오듯, 한날 제사 음식을 싸 온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혹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제주에 가게 된다면 곤을마을과 무등이왓마을 중 한 곳을 들르면 좋겠다. 곤을마을에서는 코앞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 맞으며 잠시 아파하기를, 무등이왓마을에서는 대나무숲을 지나는 바람 맞으며 잠시 슬퍼하기를. 여의치 않아 관광지를 가게 된다면, 혹 그곳이 정방폭포라면, 동광리, 상창리 주민 80여 명을 폭포 위에 세운 뒤 총을 쏘고 발길질을 해 아래로 떨어트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곳이 바로 정방폭포였다는 사실이라도 기억하면 좋겠다.
어둠이 밝힌 빛
동광 큰 넓궤에 들어갔을 때였다. 고개를 들 수도, 몸을 옆으로 돌릴 수도, 무릎을 세울 수도 없는 상태로 엉금엉금 기어 좁은 굴을 지나니 여럿이 둘러 설 수 있는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서 우리는 유일한 빛이었던 손전등마저 끄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나는 알았다. 오늘까지도 나는 내게 다가오는 역사의 메아리를 밀어내고 있었음을, 조금만 더 마음을 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슬픔에 공감하게 될까 봐, 가슴이 무너져 내릴까 봐, 그 무엇이 내게 다가올라치면 정색을 하고 덤덤히 응시하다가 애써 돌아섰음을. 그 이상의 공감은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를 누가 탓할 수 있으랴만 그때, 무방비 상태로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을 때 도리어 걸어 잠갔던 마음의 빗장이 갑자기 해제당하는 듯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보이는 것 너머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는 것 같았고, 빛의 부재로 어두워진 그 공간이 내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빛으로 환히 밝혀진 것 같았다. 저 멀리, 그리고 바로 가까이 찾아온 ‘해원(解寃)’의 임재인 듯했다.